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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이야기/딸 키우기

5세 아이가 사람을 그리는 순서

by 영글음 2010. 7. 17.

색연필이든, 크레파스든 쥐기만 하면 앞뒤로 힘차게 그어대던 아이가 원을 그리고 세모를 그렸을 때의 희열을 아시는지요? 삐뚤 빼뚤이지만 선을 연결하여 도형을 그릴 줄 안다는 게 왠지 다 키운 느낌마저 든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똥강아지가 혼자 꾸물꾸물 칠판 앞에 서서 뭔가를 그리더니 엄마를 다급히 불러댑니다. 세상에! 똥강아지 난생 처음으로 사람을 그린 것이었어요.

2010. 03. 21

제법 사람답게 얼굴에 눈 코, 입을 그려 넣고 팔, 다리까지 붙인 게 여간 잘 그리지 않았답니다. 물론 고슴도치 엄마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이지만요. 제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자 똥강아지도 신이 났는지 연신 “엄마, 나 잘 그렸어? 예뻐?”를 묻고는 조옿~다고 헤벌쭉 웃더라고요. 들뜬 마음에 남편을 불러 함께 감탄하고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겨 놓았지요.

2010. 03. 21

이게 벌써 올 3월 이야기네요. 그러니까 태어난 지 40개월 만에 그린 첫 사람입니다! 원래 머리카락은 안 그렸는데요, 제가 머리카락은 어디 있냐고 묻자 바로 그리더라고요. 군발이 아저씨로요. ^^


2010. 04. 08

그날 이후 간간히 사람 퍼레이드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니 우선 얼굴을 무지 크게 그린 다음 눈, 코, 입에 눈동자, 콧구멍까지는 잘 그리는데 귀는 종종 그리지 않더라고요. 또 몸통도 없지요. 바로 얼굴에서 팔과 다리가 솟아납니다. 처음엔 손, 발도 없었어요. 몽당귀신이 따로 없지요.

2010. 06. 19

누군가 그러더군요. 아이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인지한 순서대로 그림을 그린다고요. 아이에게는 사람을 보면 제일 먼저 보이는 얼굴과 춤출 때 휘휘 휘저을 수 있는 팔, 다리가 가장 중요한가 봐요. 우연히 다른 집에 놀러갔다가 똥강아지 친구들 역시 얼굴에 팔다리가 붙은 몽당귀신부터 그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답니다.

2010. 06. 20

하루는 남편이 먼저 시범을 보이고 똥강아지에게 따라 그리라고 했는데 제법 잘 따라하데요. 왼쪽 사람 3명은 남편 작품, 오른쪽 주황색 웃도리에 파란바지를 입은 건 똥강아지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똥강아지가 혼자서 머릿속에 있는 것을 그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한데 시간도 없는 남편이 아이와 놀아준다고 열심히 그려서 말리지는 않았어요.

2010. 06. 26 

똥강아지가 그리는 사람은 대부분 엄마랍니다. 기분 좋은 대목이지요. 가끔 결과물을 보면 ‘뜨억’할 때도 있지만 아이가 엄마를 그리지 않으면 누굴 그리겠어요? 이 그림은 제가 욕실에 있는 동안 혼자 그린 건데요, 역시나 얼굴에서 바로 다리가 젓가락처럼 나와 있는 그림이었어요. 제가 “어라? 오늘은 엄마 몸통이 없네?” 그랬더니 얼굴 안에! 쭈글쭈글 몸통을 그리더라고요. 눈 아래 코 없이 입, 입 아래 있는 원형이 바로 제 몸이랍니다. 아이다운 그림이지요.

2010. 07.  11

이건 가장 최근에 그린 그림이에요. 일명 ‘옷 입고 있는 엄마’ 그림이에요. 처음엔 얼굴 옆에 파란색 동그라미가 귀라고 생각했는데 똥강아지는 그게 엄마 팔이라더군요. 옷을 입어서 부풀은 거라고요. 얼굴에 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역시 몸통은 얼굴 안에 있지 싶은 작품이었답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니 꼭 박물관 큐레이터가 된 기분이 드네요. ^^ 오늘은 또 제가 어떻게 변신할지 무지 기대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