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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이야기/짧은 생각

1년 내내 겨울바다에 가는 여자

by 영글음 2010. 9. 4.

매일 아침 남편과 딸내미가 떠나고 난 집에서 나는 내 하루를 시작한다. 이제 전업주부가 된 지 1년이 넘었다.  그동안 기업 홍보팀에서 광고, 사보를 만들고 보도자료를 써대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직장인이었는데, 남편 공부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나니 회사를 위해 썼던 시간이 모두 내 것이 되었다. 홍보 일을 무척 좋아했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요즘 생활도 그럭저럭 마음에 든다.

 

예나 지금이나 대청소를 할 때면 영화 ‘봄날은 간다’ OST를 듣는다. 8년 전 겨울, 그러니까 내가 결혼하기 전이었고 가야할 길을 몰라 해맬 때 거제도를 달리는 차 안에서 숱하게 듣던 음악이다. 첫 멜로디가 나오는 순간이면 나는 언제나 한 곳으로 달려간다. 부드러운 곡선의 해안이 있고, 잔잔했지만 파도가 끊이지 않았으며,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오는 표현대로 ‘해풍에 섞여 있는 정도의 소금기’가 느껴지는 곳. 무엇보다 살면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내 젊은 날의 모습이 있는 곳이다.

 

거제도. 그곳에는 밭도 있었다. 도시에서만 살아온 나는 농촌과 어촌이 한데 어우러질 수 있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겨울이라 땅은 비었다. 아마도 다음 농작물을 키워낼 준비를 하느라 땅 밑에서는 아주 바쁠 것이었다.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2차선 도로를 따라 선배와 내가 섬을 달린다. 듬성듬성 단층짜리 시골집들이 나타났고 도로 길가를 따라 걷는 사람이 드물게 보였다. 햇살은 봄이라 착각할 만큼 살랑거렸다.

 

중고 경차였지만 선배는 차를 산 기념으로 이곳저곳 발길 닿는 데로 여행을 하던 때였다. 나는 울산에서 거제도를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을 함께 했다. 나와 선배는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본업 외에 사회운동단체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내 나이 스물여섯, 선배 나이 서른하나. 특별히 우울할 일도 없었지만 우울하지 않을 일도 없던 시절이었다. 작은 걸음으로 세상을 바꾸어 내고자 하는 우리의 신념 앞에 현실은 늘 날카로운 칼을 들이밀곤 했으니 말이다.

 

먹고 사는 일도 막막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회사를 때려 치웠다. 업무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입사하고 나서야 알았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학원을 다녔다. 실상 공무원은 안중에도 없었으나 학원은 내가 원하는 길을 찾을 때까지 부모님 걱정을 붙들어 맬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두 달 후면 유부녀가 될 선배 역시 방송국 조연출을 그만두고 한 단체에서 상근 간사를 하다가 쉬는 중이었으니 공식적으로 우리 둘은 실업자였다.

 

거제도라는 것 말고는 특별한 목적지가 없었기에 가다가 서는 것도, 쉬다가 다시 뜨는 것도 운전을 하는 선배 몫이었다. 도시를 떠나왔건만, 마음을 비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풀려고 하면 더욱 엉키는 실타래처럼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지고 있던 그 때에 우리 앞에 바다가 나타났다. 들어서는 길목 푯말에 ‘여차마을’이란 이름이 쓰여 있었다. 여차마을, 여차마을……. 어찌 보면 힘찬 기운이 솟는 것 같고 또 어찌 보면 가녀리게 보이는 그 이름이 나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2002 1월 거제도 여차마을

 

바다는 잔잔했다. 동그랗게 반원을 그리는 해안선이 넓게 펼쳐졌고 바닷가 뒤 조금 높은 곳에 들어앉은 마을이 해안을 감싸고 있었다. 사람 구경을 하기는 힘들었다. 배를 묶어두는 굵은 밧줄만 예닐곱 가닥 바닥에 누워 있었다. 모래 대신 깔린 까맣고 동글동글한 돌, 나중에 안 사실인데 사람들은 그걸 ‘몽돌’이라 부른다 했다. 누가 와서 시비를 걸어도 져줄 것 같은 그 돌을 굴리며 나는 생애 처음, 겨울바다를 품에 안았다.

2002 1월 거제도 여차마을

 

파도는 바다 한 가운데서부터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해안으로 왔다. 일정한 규칙은 없었지만 물거품을 만들었다 부서지고를 쉬지 않고 반복했다. 손으로 건져보면 투명한 바닷물은 햇빛의 산란 때문에 푸르게 보인다던데 왜 파도는 하얗게 일어나는 것일까. 선배가 흙길을 따라 저만치 가 있는 동안 나는 바위 위에 앉아 그 이유를 생각했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계속 하얗게 쳐대는 파도, 그것은 내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해 겨울바다는 나에게 파도 같이 살라고 했다. 남들이 가는 길만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회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겠다는 마음도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물었다. 남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자신에게 당당한 삶을 살라고 했다. 지나온 날들과 지금 서 있는 곳 그리고 앞으로 가야할 길……. 그날 저녁 인적이 드문 횟집에서 나와 선배는 꽤나 아픈 척을 하며 후회하고 다짐하고 서로를 위로했다. 바다 앞에서 모든 게 부끄럽고 혼란스러웠지만 여차마을의 파도처럼 내가 여기 있음을 알리며 나만의 빛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담았다.

 

물론, 거제도 여차마을을 겪은 뒤에도 우리는 한참을 더 헤매야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다. 여름바다가 몸을 담그는 휴식의 공간이라면, 겨울바다는 마음을 담그는 소통의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겨울바다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내 보이지 못했던 제 아킬레스건을 드러내게 하는 신통력이 있다. 그걸 인정하고 나면 새 길도 찾을 수 있다. 슬픔과 고통도 바다에 담그고 나면 농도가 옅어지고 결심은 굳는다. 겨울바다가 소통의 공간인 것은 맞으나 바다와 내가 주고받는 게 아닌, 나와 내가 소통하는 곳인 까닭이다.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는 ‘기업 홍보’라는 업무를 찾게 되어서 나는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이제 8년 전 그 시절처럼 평생 운동을 하겠다는 맹세는 하지 않는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운동가가 아니더라도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몇몇은 이런 나를 두고 자기합리화가 아니냐고 혀를 찰 지도 모른다. 나도 과거 언젠가 [다시 쓰는 현대사] 3권 표지였던 87 6월 항쟁 시청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지금 이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과거를 뒤로 한 채 2000년대에는 먹고 살기 바쁜 386 세대가 조금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회 구석구석에서 제 역할을 하는 이도 많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지금은 미국 시골 마을에 박혀 밥을 하고 책 읽고 공부하는 게 일상의 전부이지마는 종종 글을 쓰는 나는 글 속에 여러 생각을 담아낼 수도 있다. 나를 대신하여 활동하는 사회단체에 얼마씩 후원도 한다또 엄마로서 내 딸에게 세상을 제대로 보는 법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간다면, 내 비록 지금은 오늘 저녁 반찬으로 무얼 할 것인가가 지상 최대 과제인 가정주부이지만, 얼마든지 세상이 좀 더 나아지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걸 안다.

 

한 달에 네댓 번씩 대청소를 한다. 그러니까 딱 그만큼 거제도 여차마을을 간다. 좋으면 좋은 데로 추억을 가슴에 새기고 힘들면 힘든 데로 그해 겨울바다의 파도를 다시 찾는다. 언제나처럼 파도는 쉼 없이 다가 왔다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으며 손 안의 몽돌은 또르르, 또르르 잘도 구른다.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