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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야기/내가 읽은책

지금 당신이 선 곳은 광장인가, 밀실인가? [광장]

by 영글음 2010. 10. 8.

 어디에도 두 발 딛고 설 땅을 찾지 못했을 때 우리는 좌절한다. 새가 아니므로, 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하지 않던가. 어떻게든 타인과 관계 맺기를 통해 어느 사회에라도 뿌리 내리고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살아야 한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쿠루소가 되지 않는 이상 인간은 그래야 한다.

 

남자가 있다. 이름은 이명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다. 그가 원한 건 그저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한 뼘의 광장과 사랑할 수 있는 한 마리 벗이면 족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올가미는 그에게 자유를 빼앗고 선택을 강요한다. 남이냐, 북이냐.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이율배반의 상황. 양립할 수는 없다. 명준은 제3의 길을 택한다. 중립국이다. 허나 광장으로 가고 싶었던 그는 중립국으로 가던 배 안에서 바다의 품으로 뛰어든다. 목숨은 사라질 것이지만 그에게 바다는 또 다른 광장이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딸에게로 가는 사랑의 광장이다.
 



1961년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처음 읽었다. 웬만한 모든 책을 처음 읽고 있는 상황에서 구지 ‘처음’이라는 부사어를 넣은 건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읽은 <광장>의 경험은 헛된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광장과 밀실의 의미, 시대적 상황과 배경, 어쩌고저쩌고 이런 것들 달달 외지 않아도 명준과 함께 광장과 밀실을 오가는 사이 지식인의 고뇌와 냉전시대의 아픔은 저절로 다가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글의 호흡이 무척 빠르다. 단문이 많다. 쉼표도 많다. 대여섯 글자로 이뤄진 문장도 여러 번 등장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소설 전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느낄 수 있다. 믿음 없이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던 명준의 심정, 작가 최인훈의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탓에 없어진 석방자가 누구냐고 묻는 선장에게 “미스터 리입니다.”라고 답하는 선원의 말로 끝을 맺는 부분에서는 감정 수습이 어려워진다. 한창 달리다 절벽 바로 앞에서 멈춘 사람 같은 심정이 되기 때문이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자기만의 광장으로 떠난 명준을 그저 배웅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광장>은 살아 움직이는 소설이다. 최인훈이 25세의 나이로 초판을 쓴 후 지금까지 50년 동안 공식적으로 10번 개작의 과정을 거쳤다. 그저 수정 정도가 아니다. 원고지 600매 분량을 800매로 늘리기도 하고 한자어 어휘를 우리말로 다시 쓰기도 했단다. 가장 도드라진 점은 타고르호를 따라오던 갈매기 두 마리가 명준의 애인 은혜와 윤애의 암시였다가 은혜와 뱃속 아기로 바뀐 점이다. 이는 명준의 죽음이 ‘이념적 절망’에서 ‘사랑의 추구’로 변모하는 계기가 된다. 역사가 흐르면서 소설도 바뀐다는 이야기는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데, <광장>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작가 정신이 도드라지는 부분이다.

 

이 시대 우리는 ‘우리들의 광장’에 서 있을까? 블로그, SNS 등 이른바 소셜 미디어가 활발해지면서 모두가 광장으로 나온 듯도 하다. 버튼을 눌러 참여하고 글로 의견을 쏟아 붓고 토론과 토의 때로는 방향이 엉켜 마녀사냥을 하기도 하고……. 하지만 한 번 생각해 보자. 방 한구석 책상 앞에 앉아 익명성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공간을 휘저으며 마구 떠들어대는 건 정말 광장 한복판일까? 어쩌면 그건 단단하고 견고한 문짝을 달아 놓은 밀실일지도 모른다. 광장에 선 수천 개의 밀실. 문만 열면 광장인데 그것만은 거부하는 지독한 밀실에 갇힌 현대인.

 

작가는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명준은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현장에 있으려고 했건만, 오늘의 우리는 오히려 갖가지 풍문을 만들어 내며 현실을 외면하는 이가 많다. 나라도 언론조차도. 광장이기도 하고 동시에 밀실이기도 한 수상한 공간에서 발을 내딛지 못하는 슬픈 영혼이 득실득실한 2010, 한마디로 ‘잘’ 살기가 더 힘들어진 것 같다. ■

 

“개인의 밀실과 광장이 맞뚫렸던 시절에, 사람은 속은 편했다. 광장만이 있고 밀실이 없었던 중들과 임금들의 시절에,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 밀실과 광장이 갈라지던 날부터, 괴로움이 비롯했다. 그 속에 목숨을 묻고 싶은 광장을 끝내 찾지 못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광장, 7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