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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야기/내가 읽은책

아파트 없이 못사는 나라 [아파트 공화국]

by 영글음 2010. 8. 5.



“자기야, 우리 신혼집 아파트는 몇 평이야? 언제 지은 거래?”

요즘 젊은 세대가 결혼을 하면 신부가 될 여자는 작은 평수라도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꿈을 꾼다. 남자가 능력(?)이 되어 직접소유를 해도 좋지만 뭐, 전세라도 괜찮다. 아파트이기만 하면 말이다. 연일 아파트 매매가 하락과 청약 미달 사태에 관한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지만 한국에서 아파트는 이미 주거공간이기 전에 재산을 불리는 1순위 자산이 된 지 오래다.

인구는 많고 땅이 좁으니 하늘로 쌓아 올릴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모두 아파트 탄생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였고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짧은 시간 안에 가격이 몇 배씩 오르는 아파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라고 한숨 한 번 쉬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이를 그냥 넘기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꼽히고 있는 대단지 아파트. 1990년 한국을 찾은 줄레조 교수는 프랑스와 정반대로 펼쳐지고 있는 한국 아파트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대단지 아파트가 양산될 수 있었을까? 한국인들은 왜 아파트를 선호할까? 등등의 의문을 시작으로 저자는 아파트 연구를 시작했다. [아파트 공화국]은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에 관한 연구 보고서이다.



이 책은 한국 아파트 단지의 역사와 상황을 설명하며 우리의 도시&주택 정책을 이야기한다. 아파트와 중산층의 관계, 현대건축운동에서 보는 한국 아파트, 아파트의 현대성과 서구성, 단지 안에서의 사회적 관계 등도 다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성장제일주의의 현대사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숲 한 복판에서는 결코 전체를 볼 수 없듯 줄레조 역시 제3자의 입장이라 한국의 모습이 더 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정부주도하의 경제개발에 따른 아파트 건축, 분양을 통해 이익을 얻은 중산층의 배출과 그들이 어떻게 체제에 순응하게 되었는지 의미심장하게 파고든 부분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녀는 아파트 주민들의 생활을 집요하게 파헤친 끝에 실제 사는 방식보다 사회가 아파트에게 부여한 ‘고급, 현대 이미지’ 가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잡아냈다.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에 읽으며 여러 번 놀랐다.

책의 결론에서는 프랑스와 다른 나라의 대단지 아파트의 예를 들며 한국 아파트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를 걱정한다. 몇 십 년마다 재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낡은 옷을 갈아입고 새로 태어나야 할 운명을 지닌 아파트가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 로 만들고 있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오늘의 승승장구를 계속 이어갈지 프랑스처럼 쇠락의 길로 갈지, 그건 건설하기 좋아하는 우리 정부와 관계자들에게 달린 일이다.

당신이 꿈꾸던 공간, 더 좋은 집을 위한 맨 처음 생각, 그녀가 보는 것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곳, 집은 당신의 얼굴이고 당신이 사는 곳이 누구인지 말해준다고 오늘도 유혹해대는 아파트의 손길이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 덕택이다. 그녀는 2003년 한국 아파트에 대한 연구성과로 프랑스 지리학회가 수여하는 가르니에 상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