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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야기/내가 읽은책

[내 인생의 책 - 캔디 캔디] 들장미 소녀의 성장과 사랑

by 영글음 2010. 8. 3.

※ 이 글은 1년 전 글쓰기 강좌를 들을 때 썼던 글이에요. 내 인생의 책에 관해 쓰는 숙제였는데 아무리 뒤를 돌아 보아도 [캔디 캔디] 외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답니다. 현대사 책이 몇 권 있긴 한데 글로 쓰려니 정리가 잘 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하지만 지금 내 인생의 책을 골라 보라고 하면 [아직도 가야 할 길]. [희망의 밥상]을 꼽을 것 같습니다. 1년 뒤에는 또 달라지겠지만요.





1989년,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땐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온 나라가 흥분의 도가니였고, 홍콩영화 ‘영웅본색’의 장국영 때문에 꼴딱꼴딱 뒤로 넘어가는 여학생들이 줄을 잇던 무렵이었다. 아직 초등학생의 앳된 티를 벗지 못했던 나와 성남이, 정미는 6번, 5번, 12번. 같은 반이었던 우리 셋의 키 번호다. 학창시절 앞자리에 앉는 자만의 유치찬란함이 통했는지 우리는 늘 붙어 다니며 걸핏하면 정미네 작은 골방에 모여들곤 했다. 함께 나눈 숱한 일이 있었지만 장국영 브로마이드를 사 모으는 일 외에 우리의 가장 큰 업적(!)은 만화책을 낭독하며 녹음하는 일이었다. 정미네 방구석에서 뒹굴고 있던 「캔디 캔디」제3권.

사람은 셋인데 등장인물이 많으니 1인당 배정인물은 5~6명 정도였다. 주로 내가 캔디를 맡았지만 녹음할 때마다 배역은 조금씩 달라졌다. 학교 종소리를 낼 자명종 시계까지 준비되면 작업을 시작한다. 목소리가 크게 녹음되지 않을까봐 카세트에 내장된 마이크 앞에 올망졸망 입을 모으며 숨을 가다듬고 있으면 정미가 빨간 버튼을 누른다. 

풍경
(캔  디): ‘안소니가 날 좋아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람 소리와 함께 당신의 심장 소리가 들려…….’
성남(효과음): (밥그릇 두개 엎어서 말 달리는 소리) 딸그락 딸그락~
정미(안소니): 캔디, 멍하니 있다가 내 팔에서 떨어지면 안 돼.

목소리를 굵게 하여 남자 배역까지 소화하고 나면 우리는 늘 녹음 분을 듣고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펴며 깔깔댔다. 서로 연기가 어색한 부분을 교정하고 다시 녹음했다. 같은 장면을 수차례 반복하는 데도 왜 그리도 지겹지 않고 새로웠던지……. 결국 나는 한 권 당 3,000원씩을 주고 9권 전권을 사야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명문학원을 뛰쳐나와 간호사 길을 걷는 캔디


「캔디 캔디」는 1975년부터 이가라시 유미코가 글을 쓰고 미즈키 쿄오코가 그린 고전 중의 고전 만화이다. 만화책을 거쳐 애니메이션으로도 선보인 덕에 모르긴 몰라도 많은 여학생들의 성장과정에 함께 동참하지 않았을까 싶다. 안소니, 테리우스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남자 주인공들을 배출했지만 이 책은 1900년대 초 미국과 영국을 배경으로 하여 늘 쾌활하고 긍정적인 캔디가 어려움을 헤치며 자신의 사랑과 미래를 찾는 성장 만화이다.

고아원에서 자란 캔디가 아드레이家로 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곳에는 캔디의 첫사랑 안소니를 비롯하여 소년 아치, 스테아와 겪는 풋풋한 사랑과 우정이 있었고, 캔디를 죽도록 미워한 심술쟁이 이라이자와 남동생 니일과의 철저한 대립구도가 있었다. 안소니가 말에서 떨어져 죽은 뒤, 영국 성바울 학원에서 등장인물들이 다시 모여 우정을 쌓고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외사랑을 한다. 그곳에서 캔디는 운명적인 사랑 테리우스를 만난다. 테리우스를 좋아했던 이라이자와의 갈등 역시 정점에 달한다. 이라이자의 계략에 넘어가 학교 규율을 위반하고 위기에 처한 테리우스와 캔디. 하지만 그들은 위기를 계기로 자신만의 미래를 찾아 길을 걷기 시작한다. 테리우스는 연극배우의 길을, 캔디는 간호사의 길로 말이다. 캔디에게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하는 앨버트도 빼 놓을 수 없는 등장인물인데, 마지막 부분 앨버트의 진실이 밝혀지면서 9권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캔디와 테리우스가 재회하는 장면이 있긴 한데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는 독자 몫으로 남아 있다.

극적인 성공요소 골고루 갖춰

「캔디 캔디」는 여학생들을 사로잡을 만한 모든 구도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고아원 출신이지만 모든 남성들이 좋아해 주며 역경을 딛고 이긴다는 전형적인 신데렐라식 구조에 선악 관계가 뚜렷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랑에 탄생 비화, 기억상실증,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는 성장과정……. 드라마로 치면 성공요소를 고루 갖춘 셈이다. 뻔한 것 같으면서도 탄탄한 스토리와 빠른 전개 덕택에 40년이 지난 지금도 나무랄 데 없는 작품 중 작품이다.

캔디는 누가 봐도 매력적인 캐릭터이다. 특유의 엉뚱함과 명랑하고 재기발랄 면이 상대에게 늘 호감을 주었다. 만나는 남자마다, 심지어 9권에 가서는 캔디를 괴롭히던 니일마저 좋아하고 마는 다소 비현실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독자는 그녀가 성공하고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불운을 견디고 캔디가 ‘잘’ 커가는 과정이 독자에게 희망을 주지 않았을까.

매일 밤 「캔디 캔디」를 읽으며 꿈을 꾸다

100번을 읽으며 눈물을 쏟았을 무렵, 나는 캔디가 되보고 싶었다. 하지만 캔디가 되려면 우선 고아여야 하는데 나는 고아가 아니었다. 그리고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연기자가 되자! 그러면 캔디가 될 수 있을 거야!’ 요즘 연예인이 되겠다는 청소년이 많다고 하지만 내가 되고 싶었던 연기자는 단순히 돈 많이 버는 연예인과는 다른 고차원적인 것이었다. 내게 주어진 삶이 아닌 제3자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것. 그것이 내가 연기자를 꿈꾸던 매력이었다.  

1년 전까지 나는 기업의 홍보팀에서 일했다. 비록 어린 시절 그토록 갈망했던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무관하지도 않다. 지난 회사에서 대표이사에게 ‘어릴 적 꿈을 실천하게 해달라’고 졸라 기업광고용 라디오 CF를 찍을 때 여자 성우를 맡았었고 명절 때마다 고객센터 ARS 목소리 안내 녹음을 한다. 선거 때 활동하던 정당의 유세차량에도 목소리를 내보낸 적이 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어린 시절 정미, 성남이와 캔디 캔디를 낭독하며 녹음했던 것에서 비롯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이 정도면 내 인생의 책에서 「캔디 캔디」를 1등으로 꼽는데 손색이 없지 않을까? 당찬 들장미 소녀의 꿈과 사랑이 내게 미친 영향은 오늘도 계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