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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이야기/세계 여행 이야기

색이 말을 거는 도시, 칠레 발파라이소

by 영글음 2011. 6. 3.







신은 부자보다 가난한 자를 사랑하여 천국을 이리로 가져다 놓은 걸까요. ‘천국의 골짜기’라는 뜻이 담긴 발파라이소는 산티아고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발을 딛고 서면, 도시 이름 속에 담긴 의미보다 시인 네루다의 표현대로 ‘가난이 폭포수처럼 흐르는 발파라이소’가 더욱 와 닿습니다. 천국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눈에 둘러보니 골짜기는 맞는 것 같습니다.








마흔 네 개,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배기에 위태롭게 매달린 집들과 좁다란 골목마다 하늘을 이리 저리 가로지르는 전깃줄……. 어느 모로 보나 가난한 산동네의 풍경이건만 그게 그리 비루해 보이지만은 않는 건 그 앞에 푸르게 열린 바다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다채로운 색() 덕분이지요.





국제 무역이 늘고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기 전, 그러니까 19세기 초반에는 이곳이 유럽과 미국에서 오는 배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환승역이었다고 합니다. 갖가지 물건이 이곳에 부려지고 다시 태평양과 오세아니아를 건너 여러 나라로 실려 갔을 테지요. 그 시절의 영화는 누리지 못하지만 발파라이소 항구는 여전히 많은 선박이 들어와 뱃속 물건을 토해내고 다시 삼키는 곳이랍니다.

 

 



1980년대 도시를 다시 살리기 위해 칠레 정부는 국회의사당을 산티아고에서 발파라이소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산업 전체가 옮겨오지 않았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은 두 도시를 매일 오가야 했다고 해요. 그런 이유로 가끔 국회의원들이 회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산티아고에서 발파라이소까지 질주를 하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도 많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진출처: http://student.valpo.edu/kgross/chile 


이 도시를 진짜 살아나게 한 건 색의 향연이다. 분홍, 노랑, 초록, 파랑 등 집의 외벽을 감싸고 있는 형형색색의 색깔은 촌스러움도 잊고 발파라이소에 생명을 불어 넣었습니다. 항간에는 선박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칠하다 보니 여러 색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저마다 좋은 데로 칠해진 색의 축제는 그래서 더 자연스럽습니다.

 





발파라이소에서는 목적지 없이 그저 걷기만 해도 좋은 곳입니다. 여행객들을 위한 걷기 코스가 정해져 있기도 한데 꼭 그 길이 아니더라도 산동네 이곳 저곳을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면 벽 속에서도 색이 튀어나와 시선을 잡습니다. 맨홀 뚜껑, 벽에 난 구멍을 있는 그대로 사용하여 그린 그림을 보면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답니다. ^^ 상상력에 감탄하는 것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일이지요.




작품 수준에 가까운 벽화를 보는 재미도 뛰어난데, 1990년대 미술가들이 도시 재건운동의 일환으로 벽화 그리기를 했다고 해요. 공짜로 감상할 수 있는 열린 미술관이 탄생한 배경입니다. 황폐화된 도시를 다시 살려보자는 시민중심의 재건운동에 Nemesio Antunes Mario Toral 같은 작가들이 함께 했습니다.






색은 마술입니다. 담장 안 쪽 사람 사는 이야기야 어느 동네나 그렇듯 사연도 많고 슬픔, 기쁨이 뒤범벅되어 때론 볼썽사나운 꼴이 될 때도 있을 텐데 그림과 색은 살며시 그걸 덮어줍니다. 진실을 잠시 가리는 것, 이곳에서 그것은 위선이 아닌 배려가 됩니다. 이것이 예술의 힘일까요


사진출처: http://kellyrand.com/2009/02/16/street-art-in-valparaiso-chile/ 



사진출처: http://www.woostercollective.com/2004/05/profile_charquipunk.html




이곳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물은 후니쿨라(funicular). 케이블카? 엘리베이터? 뭐라 부를 지 그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객들에게는 도시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멋진 전망대이자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이 교통수단이 발파라이소의 주민들에게는 삶의 짐을 덜어주는 분담자의 역할을 합니다.

 

아랫동네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아버지는 가파른 비탈에 놓인 철로를 따라 윗동네로 올라 가족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전날 마신 술 때문에 학교에 늦은 대학생은 골목을 뛰어 내려가는 대신 울렁이는 가슴을 안고 후니쿨라를 찾을 것입니다. 이마저 없었다면 고된 삶은 두 배, 세 배로 팍팍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약 한달을 돌았던 칠레 여행 중 발파라이소는 이틀 간 머물렀던 곳이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건만 도시가 내게 준 인상은 무척 강렬했습니다. 푸른 빛깔의 바다와 하늘, 분주한 항구와 갈매기, 파스텔 톤이 아닌 명확한 색들이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오는 순간, 시선은 그대로 정지하고 말았습니다남극부터 사막까지 정신없이 모습을 바꾸는 칠레 여러 도시 중에 발파라이소는 한번, 살아보고 싶은 곳이랍니다. 가능성이 그리 크진 않지만 만약, 만약에 그런 날이 정말 온다면 그 땐 제가 그것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 볼까 합니다. 

 

 

“발파라이소는 골목도 많고 모퉁이도 많고 숨겨진 것도 많은 곳이다. 산동네에서는 가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산동네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으며, 무엇을 못 먹고 무엇을 못 입는지, 세상이 다 안다. 집집마다 내걸린 빨래와 끊임없이 늘어나는 맨발의 아이들은 벌집 같은 판자촌에서도 사랑은 식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91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