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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야기/내가 읽은책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의 역사 에세이

by 영글음 2010. 7. 27.

남들보다 한 발을 먼저 내딛는 자, 우리는 그런 사람을 선구자라고 부른다. 푸른 경치를 맛보며 편하게 걷는 산 속 오솔길도 옛날 누군가는 가시덤불을 헤치며 만들었을 것이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의 저자 하워드 진에 대해 말하자면 역사, 정치학자이면서 선구자라 할 수 있다.  미국 흑인운동의 선구자, 반전평화운동의 선구자. 그는 '역사는 아래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자세로 자신의 생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며 많은 이들의 행동을 이끌고 생각을 변화시켰다. 그를 오늘에서야 만난 게 부끄럽지만, 오늘이라도 만나서 다행이었다. 2010년 1월 8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에세이이지만 읽고 나면 미국 현대사를 배울 수 있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그의 삶 자체가 역사의 투쟁, 투쟁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총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남부의 민권운동 특히 흑인의 권리를 위한 운동이, 2부에서는 베트남전으로 비롯되는 반전 운동에 관한 역사가 하워드 진의 삶과 함께 실려 있다. 마지막 3부에서 그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보이는 희망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몇 해 전 여성의 참정권이 법적으로 인정된 것이 겨우 100년 이쪽, 저쪽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꽤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흑인 민권의 실상을 알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아리게 저려왔다. 흑인 평등의 역사가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것보다 훨씬 짧았기 때문이다. 급기야 1960년대에 벌어진 ‘앉아 있기 운동’이 인종분리 정책에 맞서 그저 식당에 앉아 있기만 했던 운동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내 무지가 흑인들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흑인과 백인이 한 자리에 앉는 것조차 금했던 시대가 내가 태어나기 불과 몇 년 전 일이었다니……!

5년 전 배낭여행을 할 당시, 인터넷에서 뒤진 값싼 숙소를 예약하고 찾아간 곳은 뉴욕 할렘. 아침을 먹으려고 들어간 식당에서 까만 피부 때문에 더욱 하얀 눈동자 수십 개와 맞닥뜨렸을 때 느꼈던 당혹스러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입으로는 만인의 평등을 이야기했지만 가슴으로는 물들 데로 물든 시선으로 그들을 보는 내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하워드 진 같은 사람들이 나섰던 덕에 과거보다 나아지긴 했어도 세상에는 아직 흑인을 보는 색다른 안경이 존재한다. 나도 여러 번 그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한다.

어디론가 달리기를 시작한 기차는 이미 방향성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역사서술도 중립을 지킬 수 없다. 하워드 진은 오히려 여러 시각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객관적이지 않은 역사가 필요하다고도 서술한다. 이런 그의 생각은 책 제목이 되었고, 나는 오늘 하워드 진의 편견을 듬뿍 담은 역사적 자전 에세이를 접했다.

그는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한 영웅적 행동에 착수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반복한다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p288)”고 말하며 독자들에게 행동하기를 권하고 있다. 나 하나가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까 끊임없이 의심하는 내게 하는 말인 것 같아 머쓱했다.

하워드 진은 인생을 던져 역사의 한복판에 나섰으나 지금 세상이 결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이만큼의 변화, 발전을 이루는데는 여럿 활동가와 조용히 지지하고 뒤따르던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이 책은 또한 말하고 있다.  말로만 하는 변화는 필요 없다. 이제 내 차례인가? 우선 할 일은 있다.
우리 집 식물을 엉망으로 해 놓고 꽃을 꺾어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옆집 흑인 꼬마를 다시 볼 것. "흑인들은 다 그런 식"이라는 인식을 살며시 내려놓고 조금은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살짜리 그 꼬맹이는 흑인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여서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나부터 바뀌지 않으면서 세상의 희망을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