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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야기/내가 읽은책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시에 담긴 소박한 일상

by 영글음 2010. 7. 24.



‘시’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학 같다. 말이 넘치는 세상에서 길게 늘이라면 또 모를까 하고 싶은 말을 단 몇 줄로 표현해야 하는 건 여간 고수가 아니고는 힘든 일이다. 그래서 좋은 시를 읽는 데는 1분도채 안 걸릴 수 있지만 머릿속 이미지는 강렬하고 여운은 오래 가는 법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펼쳤다.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라는 부제를 단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이 시집은 한 시인의 시를 모은 게 아니라 안도현이 마음에 새겼던 여러 시와 함께 짤막한 그의 감상평을 담았다. 평소 시를 즐긴다면 어떤 게 좋은 시인 줄 금세 알아차릴 텐데, 그러지 못하는 나에게는 적절한 시집인 것 같다.

시인들의 시선이 사뭇 놀랍다. 내가 늘 봐오던 풍경조차 그들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어찌 보면 하찮은 모습이건만 시인은 그것에 의미를 담고 생명을 불어 놓는다. 시를 곱씹을수록 맛이 달라지는 것도 괜한 게 아니다. 고교시절 이후 시를 어디다가 옮겨 적는다거나 하는 일이 없었는데 한 번 그래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시집에서 또 하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여러 장의 흑백사진이다. 무심한 표정으로 뻥튀기를 기다리는 아이, 복덕방 앞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하는 할머니, 대야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는 사내아이들, 500원인가 하던 파란색 비닐우산을 든 소녀……. 김기찬이 찍은 80년대 골목 안 풍경을 들여다보자면 동시대를 지나온 내 지난날이 떠올라 아련해진다. 그 느낌이 고스란히 시까지 전달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가 될 터. 

왠지 안도현의 바람대로 시를 보는 눈높이가 한 단계 상승한 것 같다. 여럿 괜찮은 시인을 만나게 해준 이 시집이 나는 참 고맙다. ■ 


※ 시 몇 편을 소개합니다.

감꽃 - 김준태

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셋지
전쟁통엔 죽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
지금은 엄지에 침 발라 돈을 세지
그런데 먼 훗날에 무엇을 셀까 몰라 

-> 안도현의 말마따나 이 짧은 네 줄 안에 몇 십년의 세월이 응축되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태백산행 -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 일곱 살이야 열 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 일곱이라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 쉰 일곱의 남자가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들에게 듣는 소리 "조오흘 때다"  설핏 웃음이 나오면서도 결국 젊고 늙었다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구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당골집 계집도 나이가 들면 그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봄날 오후 -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 공중 화장실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엿듣는 할머니들의 정겨운 잡담 소리. 한 귀로 듣고 흘렸을 법한 이야기가 시가 되다니, 시인들에겐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