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온 다음에는 통 개그콘서트를 볼 수가 없지만 서울서 그것을 한창 즐겨볼 때 나는 개그맨들의 개그보다 늘 마지막 장면에 시선을 멈추곤 했다. 프로그램을 끝낸 출연자들이 모두 나와 꽃을 던지며 꾸벅 인사하던 모습 말이다. 방송을 만든 이들의 이름이 빠르게 자막으로 처리되어 아래에서 위로 훑고 가는 사이, 환하게 웃던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부러웠다. 나도 공연 한번 해봤으면. 무대에 올랐으면…….
사진출처: 유나공장 [인생의 행복찾기] http://unafac.tistory.com
물론 TV방영 프로그램이다 보니 유명세에 따라 어떤 이는 기분이 째질 수도 있고 어떤 이는 이번만큼은 편집되지 않기를 고대하며 심기가 편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그맨으로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밑바닥에는 행복이 깔려 있지 않을까?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선을 뵌다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아는 까닭에, 감히 그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한다고 말하련다.
꼭 같진 않지만, 나에게도 무대라는 공간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합창반을 했었고 대학 때 노래 동아리, 동호회를 하며 1년에 몇 번씩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잘 해서가 아니었다. 화음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다 보면 딱 그 때만 느낄 수 있는 감동 같은 게 있다. 퍽 진부한 표현이지만 하나가 되는 기분이랄까? 나는 나이고 남은 남인데, 다른 이들이 만나 노래를 통해 하나를 이룬다는 게 내게는 마력이었다. 더구나 노래를 통해 웃음과 희망을 주고 헝클어진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건 분명 이문세의 ‘붉은 노을’ 하나로 중학교 3년 지루한 수업시간을 평정했던 경험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술자리 분위기보다 술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공연은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 없이는 말짱 꽝이다. 주제를 정하고 기획을 하고 노래를 모으고 의미를 부여한 후 구성원에게 배정을 하고, 또 요즘은 비주얼 시대니까 전체의 흐름을 깨지 않는 선에서 극이나 모션이 들어가야 한다. 거기에 표정 연기, 무대매너까지 익히다 보면 공연을 함께 만들어가는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끈함이 만들어진다.
공연 준비의 다른 묘미는 뒷풀이에 있다. 평소보다 자주 얼굴을 맞대며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별의별 이야기가 오고가는데 흔히 말하는 ‘친목’이 ‘도모’된다. 때론 노래를 이야기하고 인생을 이야기하지만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선배나 후배의 연예상담을 하며 보냈던 것도 같다.
그러다 한껏 취기가 오를 무렵, 화장실에 가고 싶어진다. 동아리 뒷풀이는 매번 허름한 중국집과 파전집에서 했는데 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고 돌아야 화장실이 나온다. 볼일을 보는 곳이 단 하나밖에 없는 탓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술자리에서 나하고 멀찌감치 앉았던 이가 내 뒤에 줄을 잇고 또 다른 대화의 장이 펼쳐지곤 했다. 변태(?) 같은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을지로3가 어느 골목에 있는 화장실 앞 밤공기가 자주 그립다.
그리운 건 여전히 많다. 뒷풀이를 할 때마다 기타를 치며 음정 박자 다 틀려도 목청 높여 합창을 하던 때가 그립다. 동아리를 만든 86학번 대선배에게 사회를 바꾸려면 돌을 들어야지 왜 노래 동아리를 만들었냐고 술 취해 꼬장(?)을 부리던 때도 그립다. 인터넷이 오늘 같지 않았을 시절, 공연장을 빌리기 위해 버스 타고 돌아다니며 땀 비질 흘렸던 때도 빼놓을 수 없다. 노래가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던 젊은 날의 내 모습도 그리워진다.
2009년을 시작하는 겨울, 우리 동아리는 총회를 거쳐 정식으로 문을 닫았고, PC통신 동호회도 일찌감치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더 이상 동아리를 찾는 새내기가 없어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무릎 쓰고 끝을 냈건만 경영, 재테크, 영어 동아리 같은 곳은 찾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한다. 젊은이에게 맘껏 노래도 부를 수 없게 만드는 대한민국 경쟁사회가 오늘은 내 그리움만큼이나 밉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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