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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이야기/내가 읽은책

[호밀밭의 파수꾼] 빌어먹을 세상을 향한 작은 외침

by 영글음 2010. 7. 6.

읽기가 불편했다. 광활한 호밀밭을 상상하며 책을 펼쳤건만 그곳에는 아름다운 자연도, 자연에서 열심히 노동하는 농부나 파수꾼도 없었다. 대신 반항아 기질이 다분한 사춘기 소년과 너저분하고 좁은 뒷골목이 떠오르는 뉴욕의 거리가 있었다.

문장마다 묻어 있는 다소 어수룩하고 성숙하지 않은 말투, 이를테면 비속어 같은 것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책 뒤표지에는 ‘재즈의 음률을 담은 수많은 속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설명해 놓았지만 한국어로 읽으니 그런 감각적인 장점이 드러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읽다 보니 속력이 났다. 주인공의 심리, 거리나 풍경 등 작가의 묘사가 매우 세밀하고 뛰어나 한 문장을 읽고 나면 다음 문장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어느새 주인공을 이해하고 그가 느꼈던 여러 감정들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제도화된 사회에서 보자면 분명 문제아이다. 이미 세 번의 퇴학경험이 있는 데다 성적불량을 이유로 네 번째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했다. 그리고 짐을 싸서 집에 돌아가야 할 날짜보다 일찍 학교에서 몰래 나와 3일 동안 뉴욕 거리를 방황하고 돌아다닌다. 이 책은 바로 이 3일간의 이야기를 홀든 콜필드의 고백을 통해 펼치고 있다.  

책을 꿰뚫는 것은 틀에 박힌 사회와 가식적인 사람들을 향한 주인공의 분노이다. 그것은 억압된 사회에서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외침이며, 이를 받아들이기가 힘든 젊은 날의 방황이다. 아버지는 변호사에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드는 형, 어머니 그리고 천사 같은 여동생……. 화목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홀든 콜필드만이 골칫거리다. 그래서 그는 더욱 외롭다.

웃기게도 주인공은 분노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어른 같이 행동하려 한다. 뉴욕 뒷골목을 누비면서 큰 키에 새치머리를 무기로 하여 술집에 가서 당당히 술을 마시려 하고, 묵고 있는 호텔 벨 보이가 소개해주는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려고도 한다. 모두 그가 어리다는 것을 알아채기 때문에 술 대신 콜라를 마시고 여자와는 몇 마디만 주고받고도 비용을 치르지만 말이다. 3일 동안 계속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만날 사람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어쩌면 자신의 일탈을 누군가 잡아주었으면 하는 심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장을 덮을 때면 우리는 반항아 홀든 콜필드 대신 더 없이 순수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죽은 남동생 앨리를 그리워하고 여동생 피비를 향한 애틋한 사랑, 또한 넓은 호밀밭에서 아이들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꿈……. 이는 홀든의 진정한 내면을 파악할 수 있는 요소이며 막 되먹은 줄만 알았던 한 소년에게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첫 페이지를 열기 전 작가 샐린저의 약력을 먼저 봐버린 탓일까. 읽는 내내 홀든 콜필드의 고백이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작가의 삶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역시 외롭고 고독하고 극본이 잘 짜진 이놈의 사회에 진절머리를 내며 사춘기를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현실을 쳇바퀴처럼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삶, 권력을 가진 자가 만드는 세상, 다수의 의견만이 존중받는 사회, 이미 만들어진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스스로 나가든 쫓겨나고 마는 이 빌어먹을 사회에서 어느 누가 홀든처럼 용감하고 솔직할 수 있을까. 그의 진정성을 알고 나서 느끼는 따뜻한 마음 외에도 이 책을 읽으면 나 자신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주인공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 홀든이 되기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결국 그도 다시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며 성장하겠지. 하지만 작은 외침도 질러보지 못하고 다 커버린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지금 가는 길이 옳은지 그른지도 판단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가야하는 우리에게 홀든 콜필드는 작은 일격을 가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