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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이야기/세계 여행 이야기

[칠레] 라세레나 바다가 부르는 잔잔한 노래

by 영글음 2011. 5. 6.



활기찼던 산티아고를 벗어서 칠레 북부를 향했습니다. 엿가락처럼 길게 늘인 나라에서 중심을 지나고 나니 창밖으로 분위기가 전혀 다른 풍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산들은 점점 옷을 벗고 선인장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땅은 물기를 잃어갑니다. 한참을 달려도 초원은 끝이 나지 않고 멀리 보이는 산과 구름마저 따라오기에 지쳐 한걸음씩 뒤로 물러서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해는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지요. 어둑해질 무렵 난생 처음으로 은하수도 눈에 담았답니다.



저녁에 도착한 라세레나는 칠레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도시입니다. 도시 이름이 입 안에서 또르르 굴러갑니다. 라세레나. 이것의 뜻은 ‘잔잔한 것’이라고 하던데 이곳에 있는 동안 그 의미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지요. 기온이 온화하고 범죄율이 낮아 칠레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기도 했다고 해요.

 

다음날 아침,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하는 아리송한 날씨였습니다. 우리는 바다에 가기로 했지요. 칠레의 웬만한 도시는 바다를 끼고 있답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곧 태평양의 넓은 품에 안 길 수 있지요. 유독 산보다 바다를 좋아하는 저에게 칠레는 “이렇게 자주 봐도 바다가 물리지 않느냐”며 놀리는 것만 같습니다.








바다로 가는 길, 야자수 모양의 나무가 길가에 양 갈래로 200m쯤 늘어서 우리를 맞이합니다. 그 길을 따라 걷노라면 꼭 신랑, 신부가 되어 행진하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우리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반반씩 나누어 맞으며 걸었습니다. 나무 냄새와 뒤섞인 바다의 짠 냄새가 살갗으로 내려앉아 스며듭니다




야자수 길이 끝나자 넓디넓은 바다가 다가왔습니다
. 낯선 곳을 여행하느라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녹아내립니다. 그런데 바다를 그리워하는 건 저뿐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새 다섯 마리는 모래사장에 자기들의 발자국을 찍었다가 물러서고 다시 찍곤 합니다.


칠레 사람들은 여름(2, 3월 경)에 휴양지로 라세레나를 찾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갔을 때는 막 휴가철을 끝낸 텅 빈 바다였지만 막바지 여름을 즐기러 온 가족이 있었습니다. 짐과 차림새를 보니 동네에서 온 가족 같습니다. 막내 꼬마는 빈 물병에 모래를 담았다, 바닷물을 담았다 합니다.




그네들은 우리가 다가갔다가 멀어질 때까지 합심하여 손을 흔들어줍니다.




누군가 모래성을 쌓아 놓았습니다
. 성곽 주변을 조개로 박아 튼튼하게 꾸며 놓았고 미리 준비를 했는지 색종이로 된 깃발 여러 개가 성에 꽂혀 있습니다. 무척 정성을 들인 모양입니다. 넓은 모래사장은 한 여름에 꽤나 인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간이매점이 보입니다. 역시 휴가철엔 햄버거며 핫도그 등을 팔면서 정신없이 바빴을 테지요. 하지만 지금은 늙은 여인이 홀로 앉아 손님이 주문을 한 다음에야 구석에 쌓아 둔 식재료를 매우 느린 동작으로 챙기고 있습니다. 커피를 한잔 시켰습니다. 역시 10분쯤 지나서 커피를 받아들 수 있었습니다. 예상보다 너무 큰 컵에 가득 나와서 놀랐습니다.

 

바다 위에 철썩이는 파도를 보면서 커피를 마시다……. TV에서 봤던 광고 같습니다.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지 않은가요? 그런데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자 분위기가 확 깨져 버렸습니다.

 

“어휴, 도대체 이게 설탕물이야, 커피야?

 

커피가 너무 너무 달았습니다. 커피를 무척 좋아하는 저에게는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맛도 맛이지만 커피 한 잔을 비우면서 사색에 잠기는 그 짧은 몇 분을 무척 좋아하는 것이지요. 마치 애연가들이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시간을 사랑하듯이 말입니다.


커피 생산국인 브라질이나 콜롬비아와 같은 남미대륙에 있는데도 칠레의 커피는 대체적으로 너무 맛이 없었습니다. 이럴 땐 캔 커피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칠레를 포함해 다른 나라에서는 캔 커피를 파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 탓에 저는 여행을 하는 동안 김치만큼이나 캔 커피가 그리워 죽을 지경이 되곤 했습니다. 그때 담배 끊은 사람이 그것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이해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