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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이야기/짧은 생각

가족이란 이름이 좀 버거울 때

by 영글음 2011. 4. 12.



며칠 째 비가 온다. 뒤뜰에서 막 고개를 내민 상추 새싹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 되련만, 나에게는 그저 흐리고 가라앉은 날의 연속이다. 햇볕을 보면 우울한 기분이 나아지려나 하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번 주 일기예보, 목요일 잠깐 해 뜨고 나머지는 모두 비, , . 조금 더 허우적거려야 한다.

 

요즘, 가족이 과연 무얼까 생각한다. 내가 만든 가족 말고, 나를 만들었던 가족이 따뜻함, 배려, 사랑의 단어를 넘어 굴레, 구속이 되면서 드는 상념이다. 어릴 적 나는 모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 또한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인줄 알았다. 언제나 부모는 자식을 감싸고 자식은 공경으로 부모를 위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뉴스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성폭행했다는 기사가 들린다. 그래, 이건 좀 극단적인 예라고 치자. 내 경우, 나이가 들고 부모를 떠나 가정을 꾸려 살다 보니, 아니 자식과 부모가 아닌 성인 대 성인의 관계에 서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 형제가 나와 참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같은 울타리에서 27년이나 함께 살았는데도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고 성격, 습관이 전혀 딴 판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이 세상 사람은 누구하고든 다르니까. 남편은 물론이고 내 딸 또한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다름을 다르다고 이해하고 존중하면 좋을 텐데, 그러지 않는다는 게 꼭 문제를 만드는 것 같다. 자기가 고수한 삶의 방식을 자식에게 충고, 권유란 이름 하에 강제할 때 관계는 일그러지고 상처받는 이가 생겨난다.

 

내가 살아 보니로 시작하는 어른들의 말이 나는 그래서 싫다. 사람이 천 명이면 사는 방식도 천 가지, 생길 수 있는 가짓수도 천 가지가 될 수도 있는데 꼭 정답이 하나인 것처럼 말하는 게 나는 답답하다. 부모가 살아온 경험의 중요성을 나 몰라라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도 생각이 있고 최대한 행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는데 그게 깡그리 무시되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둘째 아이를 가졌다는 내 말에 우리 엄마는 충격을 받았다.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트라우마 탓이다.  둘째라는 것 자체가 너무 싫단다. 축복받고 싶었는데, 누구보다도 엄마에게 축복받고 싶었는데 나는 아직 그러지 못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기 싫다, 이해해야 한다를 반복하고 있다. 관심 끄고 살고 싶어도 가족이기에, 내 엄마이기에 그럴 수도 없어 그저 가슴 한구석을 쓸어 내리며 한숨 짓는 일이 전부다.

 

언젠가 엄마가 날 이해해줄 날이 올까? 내 둘째 아이가 예쁘게 태어나 잘 자라면 그땐 인정해줄까? 그때가 되면 내가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까? 비가 아무리 몇 날 며칠 내린다 해도 언젠가는 그치고 해가 뜨겠지. 뜨거운 햇볕을 받고 우리 집 뒤뜰의 상추, , 부추 등은 또 생명의 신비를 선보일 것이다. 엄마와 내 마음도 그렇게 자연의 이치처럼 풀어지면 좋으련만,  지금으로선 버거울 뿐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어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