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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 이야기/세계 여행 이야기

[칠레] 십자가 위에서 바라본 코킴보의 붉은 일상

by 영글음 2011. 5. 10.



라세레나 바다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 동안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던 일본인 사야카와
, 칠레 인 리디아를 만났습니다. 둘은 옆 동네인 코킴보에 갈 것이라 했습니다. 라세레나 해안선을 따라 왼쪽으로 눈을 돌리다 보면 나지막한 언덕에 집이며 건물이 빼곡히 들어앉은 게 보입니다. 그리고 높이 솟아 있는 십자가도 희뿌옇게 보이지요. 그 동네가 바로 코킴보랍니다.




별다른 계획이 없었던 우리는 ‘얼씨구나’ 하고 그들을 따라 나섰답니다. 넷이서 신발을 벗고 바닷가를 따라 걸었습니다. 걸어서 그곳까지 갈 생각이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한 시간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눈앞의 코킴보가 더욱 멀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마법 그 자체였지요. 하는 수 없이 우리는 해안가를 빠져 나와 코킴보로 가는 버스를 타고 20분을 달려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점심때가 훨씬 지난 시간이라 배부터 채웠습니다.

 

사야카가 라세레나 바닷가에서 보이던 그 십자가에 올라가자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코킴보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에 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십자가의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는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뛰다가 걷다가 경보 수준으로 언덕을 올랐습니다. 사야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야 한다면서 입고 있던 점퍼를 허리에 묵고 앞장섭니다. 그 무렵, 리디아는 아래에서 기다리겠다며 다녀오라고 합니다. 급하게 서두르는 것이 남미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나 봅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우리도 잠시 망설였지요. 사야카를 따라갈 것인가, 리디아를 따를 것인가. 이렇게 정신 없이 보고 나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까? 그러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는 거대한 십자가를 보니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가자!






십자가의 정확한 이름은 <Cruz del Tercer Milenio>입니다. 이 십자가는 콘크리트로 지었는데 높이가 무려 96m나 돼서 바로 아래에서 꼭대기를 보려면 고개를 90도 이상 뒤로 꺾어야 합니다. 목이 아파서 오랫동안 볼 수도 없지요. 정확히 20분을 남겨두고 우리는 십자가에 도착했습니다. 기도실과 박물관은 건너뛰고 바로 꼭대기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그것은 건물 30층 높이까지 쉬지 않고 한 번에 내달려 올라갔습니다. 이윽고 문이 열립니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한 발을 내딛었습니다.




그러자
, 갑자기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갑니다
. 창문 너머로 눈앞에 보이는 바다는 오늘의 일과를 마친 태양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삼키고 있었습니다. 일상의 반복이건만 뭐가 아쉬운지 태양은 남은 힘을 다해 몇 줄기의 빛을 우리를 향해 보내고 있었지요. 잔잔한 바다 위에 한가롭게 떠 있는 몇 척의 배도, 기차놀이를 하듯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도 온통 붉은색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볼 수 있는 평범한 집과 마을이 한꺼번에 거대한 빛으로 물든 모습을 바라보자 마음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고달픈 일상의 삶마저 숭고하게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저 멀리 우리가 출발했던 라세레나의 해변이 보입니다. 걸어 왔으면 아직도 도착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반대편으로 코킴보의 마을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마당 의자에 턱을 괴고 앉아 무언가 고민을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 5열 종대로 빨래를 내 걸고 있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담깁니다. 낡은 가옥들 사이에서 공놀이를 하는 동네 아이들 뒤에는 자신의 키보다도 3배가 넘는 그림자가 길게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붉은 세상이 검게 변할 무렵, 여행 전의 나와 끝난 후의 내 모습도 달라져 있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갖고 우리는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