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 이야기/내가 읽은책

숲과 삶이 통하는 이야기 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

by 영글음 2011. 2. 20.

본디 책이란 여러 장 종이의 묶음이건만, [내 젊은 날의 숲, 김훈, 문학동네, 2010] 안에서는 느릿느릿 숲의 소리가 흘러 나온다. 자작나무, 편백나무, 저어나무, 작약꽃, 도라지꽃, 연꽃……. 그것들의 이름을 또르르, 또르르 입 안에서 굴리다 보면 민통선 자등령 고개 사이로 숲이 흔들리며 수런거리는 소리가 자박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나무는 늙은 나무들도 젊은 잎을 틔우니까 한 그루 안에서 늙음과 젊음이 순환하는 겁니다. 인간의 시간과는 다르지요(212p).”라며, 일흔이 넘은 숲 해설사가 수목원을 찾은 노부부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한 인간의 시간 안에도 나무와 같이 젊음과 늙음, 삶과 죽음, 기쁨과 슬픔 같은 것들이 한데 범벅 되어 백설기 같은 조각이 나뒹구는 듯하다.

 

연주는 세밀화를 그리는 여자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뇌물죄와 알선수재로 인해 감옥에 있는 동안 직장을 옮기게 되는데 그곳이 민통선 안 국립수목원이다. 계약직으로 꽃과 나무의 영구보관용 세밀화를 그리는 일을 한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속에서 연주는 계절에 따라 나무가 열리고 꽃이 피는 것을 관찰하며 그림에 담아낸다. 그리고 연구실장 안요한과 그의 여덟 살 아들 신우를 만나고, 한 켠에서 김민수 중위를 만난다.

 

세밀화를 그리는 연주의 눈으로 봐서 그럴까, 아니면 글을 쓰고 나니 연주가 꼭 세밀화가가 되어야 했던 걸까. 풍경 묘사가 무척 섬세하다. 당장 눈에 보이는 모습은 물론이고 나무가 잎을 틔워내는 찰나나 꽃이 생명의 결정체를 세상 밖으로 들이 내미는 순간의 절묘함까지 그리고 싶어하는 연주 덕에 문장 하나, 하나를 읽을 때마다 숲 한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다. 다만, 시간을 충분히 두고 읽지 않으면 자칫 지루해질 순간이 올 지 모르겠다. 따라서 이 소설의 참 맛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은 이라면 직접 세밀화가가 되어 오롯이 읽어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분명, 글이 내뿜는 작가 김훈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숲이 살아 숨쉬는 묘사는 세밀한 대신에 작가는 주인공 연주의 감정 설명에는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독자는 연주 눈에 비친 등장인물의 행동과 말, 숲 묘사만으로 모든 것을 느껴야 할 뿐, 직접적으로 연주의 마음을 들여다 볼 기회가 거의 없다. 단 한 번도 극한으로 치닫는 감정의 변화 없이 [내 젊은 날의 숲]은 참 건조하고 덤덤하다.

그래서 평생 윗사람에게 굽실거리며 비리를 저지르는 일까지 장단을 맞춰야 했던 아버지나 그런 아버지가 더는 싫다며 밤마다 자신의 슬픔을 무기 삼아 딸에게 전화해대는 어머니, 뒷모습 가마까지 닮아 오히려 먹먹했던 안요한 부자나, 제대 전 연락처를 주며 꼭 보자고 다짐하는 김민수 중위에 이르기까지 연주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고 나는지 우리는 다만 짐작할 뿐이다.    

 

모범수였던 아버지가 출소한 뒤 병을 얻어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을 때 연주에게 한 말은 괜찮다’, ‘미안하다가 전부이다. 작가는 말하여질 수 없는 말들의 핵심부에 닿아 있는 것이어서 그래서 그 두 마디만으로도 한 생애를 요약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258p).”고 연주를 통해 말했다. 확실히 이 소설은 구구절절 언어를 끼워 넣지 않는 그 틈 속에 삶이 있고 아픔, 회한 같은 것들이 있는 것 같다.

 

결국 연주는 아버지의 뼛가루를 쌀밥과 버무려 자등령 숲으로 보낸다. 그것은 덩치 큰 새들의 먹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육신을 태워 자연으로 다시 태어나 하늘을 날 것이다. 계약직의 계약이 끝나고 연주는 숲을 떠나 서울로 갔다. 역시 짐작이지만, 연주는 마음의 짐이었을 아버지와 머물던 장소를 교차시키며 화해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구절, 자폐성향이 있어 어머니에게로 간 신우를 생각하며 한 번 안아주고 싶다는 게 그걸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런지. 

내젊은날의숲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훈 (문학동네, 2010년)
상세보기


 

※ 사람들이 김훈, 김훈 하길래 마음먹고 읽은 책이다. 참으로 건조하고 다가서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읽은 뒤 종종 숲이 생각난다. 여운이 길다. 서평 쓰기가 너무 어려워 오래 고민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2년 전 민통선 안 맥문동 밭을 가볼 기회가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때 먹은 쌉싸래한 민들레 나물이 생각났다. 숲에서 나는 밤 부엉이 소리를 들으면 무척 좋을 것 같다.